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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이야기

정수론의 아버지,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1601~1665)

by buchoe81 2025. 9. 16.

1. 생애와 배경

  페르마는 1601년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보몽드로마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비교적 부유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젊은 시절에는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철학, 그리고 법학을 익혔습니다. 오를레앙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한 뒤에는 툴루즈 고등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하며 평생을 공직자로 살아갔습니다.

  그의 직업적 정체성은 법률가였지만, 삶의 열정은 수학과 자연철학에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데카르트, 갈릴레이, 호이겐스 등 새로운 과학적 사유가 꽃피우던 시기였고, 페르마 역시 이 흐름 속에서 독자적으로 수학적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그는 출판을 통한 학문적 명성을 좇지 않았고, 주로 서신이나 책의 여백 메모를 통해 아이디어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디오판토스의 저서에 남긴 짧은 주석들은 후대에 거대한 문제와 도전 과제를 제공했습니다.


2. 연구 태도와 특징

  페르마의 연구 방식은 매우 독특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발견을 하면 증명을 자세히 쓰지 않고 결과만 남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바로 “나는 놀라운 증명을 갖고 있으나 여백이 좁아 적을 수 없다”라는 메모입니다. 이 문장은 수 세기 동안 수학자들을 매료시켰고, 결국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는 거대한 수학사의 드라마를 낳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동시대의 여러 학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파스칼과는 도박 문제를 두고 논의하며 확률론의 기초를 닦았고, 메르센, 데카르트 등과도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하지만 페르마는 자기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거나 출판하려는 의지가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생전에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3. 수론의 혁신

  페르마가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분야는 정수론입니다. 고대 그리스 수학 이후 크게 진전되지 못했던 정수 연구를 그는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는 수의 기본 성질을 탐구하면서 수많은 추측과 정리를 제시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소수와 관련된 놀라운 법칙들을 발견했고, 일부는 오늘날 암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특정한 꼴의 수가 소수인지 합성수인지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남겼는데, 이는 훗날 수학자들에게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어떤 소수가 두 제곱수의 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는데, 이는 오일러와 가우스 같은 후대 수학자들이 더 확장해 나갔습니다.

  가장 유명한 업적은 역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입니다. 그는 세 제곱수나 네 제곱수 이상의 거듭제곱수는 결코 피타고라스 정리처럼 세 수의 합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증명을 남기지 않았고, 그 빈자리는 350년 넘게 전 세계 수학자들을 괴롭혔습니다. 이 문제는 1994년 앤드루 와일스가 현대 수학의 도구를 동원해 해결하면서 비로소 수학사에서 가장 오랜 수수께끼 중 하나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4. 해석기하학과 미적분의 기초

  페르마는 곡선과 직선, 면적과 같은 기하학 문제를 대수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출판을 통해 널리 알린 해석기하학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독자적 성과였습니다.

  특히 그는 곡선의 접선을 구하는 방법과 함수의 극값을 찾는 방법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이는 훗날 미적분학의 기초 개념으로 이어졌습니다. 페르마가 제시한 방법은 지금의 미분법과 매우 유사한 사고방식이었으며,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체계적인 미적분학을 정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5. 확률론의 탄생

페르마는 파스칼과 주사위 게임이나 도박 문제를 주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확률 개념을 체계화했습니다. 예컨대 “승부가 중단되었을 때 상금을 어떻게 공정하게 나눌 것인가”와 같은 문제는 확률과 기댓값 개념을 필요로 했습니다. 두 사람의 논의는 이후 확률론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시발점이 되었고, 현대의 통계학과 데이터 과학에까지 연결됩니다.


6. 광학과 물리학의 기여

  수학자이자 법률가였던 페르마는 자연현상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빛이 한 매질에서 다른 매질로 이동할 때, 실제로 선택하는 경로는 통과 시간이 최소가 되는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훗날 “최소 시간의 원리”라 불리며 물리학에서 중요한 원리가 되었습니다. 이 사상은 변분법으로 발전했고, 나아가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광학 이론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7. 동시대와의 비교

  페르마는 데카르트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업적을 책으로 출간하여 즉각적으로 명성을 얻은 반면, 페르마는 조용히 판사 생활을 하면서 여가 시간에 연구한 결과를 메모나 편지에 남겼습니다. 이 때문에 생전에는 큰 명성을 얻지 못했지만, 후대 학자들이 그의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계승하면서 그 가치는 더욱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또한 파스칼과의 교류는 확률론이라는 전혀 새로운 분야를 탄생시켰고, 오일러나 가우스 같은 거장들에게 결정적 영감을 주었습니다.


8. 유산과 영향

  페르마의 이름은 수많은 정리와 개념 속에 남아 있습니다. 정수론의 중요한 명제, 특정한 수열, 확률론의 기초 개념, 광학의 원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직업적 신분이나 제도적 지원과 상관없이, 순수한 열정만으로 학문적 혁신을 이끌어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전문 수학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학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단순한 수학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지적 호기심과 끈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9. 결론

  페르마는 겉으로는 평범한 판사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시대를 앞서간 수학의 개척자였습니다. 그는 정수론의 발전을 이끌었고, 미적분의 씨앗을 뿌렸으며, 확률론의 탄생을 도왔습니다. 또 물리학에서도 원리를 제안하며 학문적 사고의 폭을 넓혔습니다.

  그가 남긴 짤막한 메모와 서신은 단순한 수학적 주장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후대의 수학자들에게 도전 과제를 던지고, 탐구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결국 페르마는 “증명을 생략한 채 결과만 기록하던 신비로운 수학자”로서, 수학적 창의성과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