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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이야기

리만 가설의 주인공, 독일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1826-1866)

by buchoe81 2025. 9. 10.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리만은 1826년 9월 17일 독일 하노버 왕국의 작은 마을 브레세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가난한 루터교 목사였다. 어린 시절 리만은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지만, 머리가 매우 총명하여 또래보다 일찍 수학적 재능을 드러냈다. 그는 종종 성경 속 족보나 수치를 분석하며 놀았고, 이러한 습관은 그가 논리적 구조와 숫자의 관계를 깊이 탐구하는 데 특별한 흥미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리만은 병약하여 체력적으로는 뒤처졌지만, 지적인 호기심과 기억력, 집중력에서는 압도적인 능력을 보였다.

 

  그의 학문적 재능은 교사와 목회자들의 눈에 띄어 특별한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원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학자가 되길 기대했으나, 리만은 점차 수학에 매료되었다. 1846년 괴팅겐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는 처음에는 신학을 공부했지만 곧 가우스의 강의와 도서관에서 접한 수학 서적들에 큰 충격을 받고 진로를 바꾸었다. 당시 괴팅겐은 수학과 과학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가우스의 존재는 젊은 리만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괴팅겐의 수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1847년 리만은 베를린 대학교로 옮겨 수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디리클레, 야코비, 아이젠슈타인 등 당대의 거장들에게 배웠고, 엄격한 논리적 추론과 혁신적인 사고를 동시에 추구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1849년 리만은 괴팅겐으로 돌아와 연구를 이어갔으며, 185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 논문은 “복소변수 함수 이론의 기초”로, 오늘날 “리만 표면”이라 불리는 개념을 처음 제시하였다. 리만 표면은 복소함수의 다가함수성을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했고, 이는 해석학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었다. 이 아이디어는 수학자들뿐 아니라 물리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전자기학, 유체역학, 양자역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함수와 공간의 구조를 설명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리만의 가장 유명한 업적 중 하나는 1854년 하빌리타치온 강연 “기하학의 기초에 관하여”였다. 당시에는 수학자들이 대부분 고전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틀에 머물러 있었지만, 리만은 공간 자체를 일반화된 다양체로 사고할 수 있음을 제시했다. 그는 곡률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어 공간의 국소적 구조를 설명할 수 있는 수학적 언어를 마련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리만 기하학”이다. 리만의 기하학은 단순히 추상적 수학 이론에 그치지 않고, 20세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의 수학적 기반이 되었다. 리만이 열어놓은 길은 “공간이 평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점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는 현대 물리학에서 시공간과 중력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혁명적 도구가 되었다.

 

  1859년 리만은 또 다른 기념비적 논문 “소수의 분포에 관하여”를 발표하였다. 이 짧은 논문에서 그는 제타 함수를 해석적으로 연장하고, 이를 통해 소수 분포와 밀접한 관계를 발견했다. 여기서 제기된 “리만 가설”은 제타 함수의 모든 비자명한 영점이 실부 1/2 위에 놓인다는 주장이다. 이는 소수의 분포를 정밀하게 설명하는 핵심 열쇠로 여겨지며, 1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수학계의 최대 난제로 남아 있다. 이 가설은 단순히 정수론의 문제를 넘어 암호학, 난수 생성, 통계물리학, 양자혼돈 이론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되어 있어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클레이 수학연구소가 선정한 밀레니엄 7대 난제 중 하나로 포함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리만은 또한 적분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여 “리만 적분”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는 함수의 면적을 체계적으로 계산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오늘날 해석학 교육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정의로 자리 잡았다. 물론 이후 르베그 적분 등 더 일반적인 개념이 개발되었지만, 리만 적분은 여전히 수학의 기초 교육과 연구에서 중요한 출발점으로 남아 있다.

 

  그는 전기역학과 물리학에도 관심을 두었으며, 디리클레의 영향을 받아 전위론과 편미분방정식을 연구하였다. 리만의 방식은 언제나 엄밀한 분석과 직관적인 기하학적 사고를 결합하는 것이었다. 그는 추상적 수학을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도구로 보았고, 이러한 태도는 훗날 수리물리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리만의 삶은 병약함으로 인해 길지 않았다. 그는 폐결핵으로 오랜 시간 고통받았고,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종종 요양을 필요로 했다. 1866년 여름, 그는 건강 회복을 위해 이탈리아 셀라스카에 머물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비명에는 “그의 업적은 영원히 남으리라”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으며, 이는 과장이 아닌 사실로 평가된다.

 

  리만의 학문적 스타일은 특징적이었다. 그는 말을 아끼고 발표를 두려워할 정도로 내성적이었지만, 글로 남긴 작업은 언제나 깊이와 정밀함에서 압도적이었다. 그의 논문은 길지 않지만, 한 편 한 편이 전혀 새로운 분야를 열어젖히는 힘을 지녔다. 현대 수학자들이 수백 권의 책에서 다루는 내용을 리만은 단 몇 쪽의 논문에서 씨앗처럼 제시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농축된 업적은 리만을 “짧지만 가장 깊은 족적을 남긴 수학자”로 기억하게 한다.

 

  그의 이름을 딴 개념은 수없이 많다. 리만 기하학, 리만 표면, 리만 적분, 리만 제타 함수, 리만 가설 등은 모두 수학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리만-로흐 정리”, “리만-힐베르트 문제” 등은 이후 수많은 수학자들이 이어받아 발전시킨 핵심 주제들이다. 그가 남긴 작업은 단순히 한 세기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연구의 최전선에 있으며, 앞으로도 수학과 과학의 미래를 이끌어갈 것으로 평가된다.

 

  베른하르트 리만은 수학사에서 단순히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연 혁신가였다. 그의 연구는 수학을 추상적 형식에서 벗어나 세계의 근본 구조를 탐구하는 언어로 변화시켰다.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사상은 지금도 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며, 그의 이름은 영원히 수학의 역사 속에 빛나고 있다.